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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11

진공도 다 같은 진공이 아니다

이하나   
https://fusionnow.nfri.re.kr/post/nuclear-fusion/735

 

 

진공은 기체(물질)가 없는 빈 공간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압력이 제로(0)인 상태죠. 동양에서는 허공(虛空)이라 불렀고, 영어로는 ‘Vacuum’입니다.

 

 과학기술에서 진공의 역사는 생각보다 깊습니다. 고대 철학자(겸 과학자)들이 격한 논쟁을 벌였던 주제였으니까요. 우주와 세상의 기원에 관심을 가졌던 그들로서는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데모크리토스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우주에 존재하는 것은 원자와 빈 공간뿐, 그 외에 모든 것은 의견에 불과하다.”

 

 태초에 진공이 있었습니다. 이 진공 상태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었으니까요. 자연계의 대표적인 진공 상태는 우주의 빈 공간입니다. 당연히 공기도, 중력도, 기압도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거의 없습니다. 파동을 전달하는 매질도 거의 없으니 소리도 전달되지 않습니다. SF 영화에서 우주선의 엔진 소리나 우주에서의 총소리, 부딪히는 소리, 폭발음 등이 가끔 나옵니다. 과학적 오류입니다. 극적 효과를 위한 음향 장치에 불과하죠.


인공으로 최초의 진공을 만든 토리첼리(왼쪽)와 그가 수은으로 실험한 그림. <사진 출처=위키피디아>

 


◇ 토리첼리의 실험부터 가속기까지

 

 인공으로 진공 상태를 만든(발견한) 최초의 인물은 이탈리아 물리학자 토리첼리입니다. 이 사람 이름을 잘 기억해 두어야 합니다. 진공을 이야기할 때 꼭 등장하는 인물이니까요(잠시 뒤에 또 나옵니다). 그는 1643년 하나의 실험을 수행합니다.

 

 수은을 가득 채운 유리관을 수은이 담긴 통에 뒤집어 세웠습니다. 그랬더니 유리관의 수은이 통으로 내려오다가 일정한 높이에서 멈추는 것을 발견합니다. 유리관 수은의 높이는 항상 일정하게 76cm를 유지했습니다. 이때 유리관의 빈 공간이 진공 상태였습니다. “자연에 진공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이 2,000년 만에 뒤집히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과학자들은 왜 진공에 관심이 많았을까요? 일반 대기압 상태에서는 관찰하기 어려운 다양한 현상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이것을 응용하면 뜻하지 않은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거죠.

 

 실제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 뢴트겐이 X-선을 발견한 것도 진공기술 때문이었습니다. 전구의 발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산업계에서는 표면 처리에 진공기술이 주로 응용되었습니다. 표면 처리에 필요한 기체 분자만 밖으로 뽑아내는 진공펌프가 개발되기도 했습니다. 

 

 물리학자들은 고대 철학자들처럼 더 근원적인 질문의 답을 찾는 데 진공상태를 활용합니다. 진공을 이용해 원자의 존재를 입증하고, 원자보다 더 작은 입자를 찾아 나선 것입니다. 유럽입자물리학연구소(CERN)에서 만든 강입자충돌기(LHC)와 같은 가속기가 그런 일을 합니다. LHC는 두 개의 입자 빔을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충돌시켜 빅뱅 직후의 상황을 재현해 여기서 다양한 실험 결과를 얻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부 조건이 최대한 우주공간과 같아야 합니다. 입자를 가속하는데 다른 기체 분자와 충돌한다면 원하는 실험결과를 얻을 수 없겠죠?

 


유럽입자물리학연구소(CERN)의 강입자가속기(LHC). <사진 출처=CERN>

 


◇ 진공상태에도 입자 물질이 있다?

 

 그런데 진공도 다 같은 진공이 아닙니다. 어떤 진공상태이냐에 따라 달리 응용되기 때문입니다. 우주공간이든 인공으로 만든 진공 상태든 ‘완전 진공(혹은 절대 진공)’은 없습니다. 우주 공간에도 극소량이지만 입자물질들이 계속 움직이고 있습니다. 인공으로 완전한 진공을 만들기는 더 어렵습니다. 심지어 진공 상태로 감싸고 있는 물체의 벽에서도 입자가 나오니까요.

 

 

 그래서 일반적으로 대기압보다 압력이 낮으면 진공으로 분류합니다. 압력의 단위로 Torr(토르)를 사용하기도 하는데요. 눈썰매 좋은 분은 벌써 눈치챘을 겁니다. 네, 바로 위에서 언급한 토리첼리의 이름에서 따온 것입니다. 1기압은 760Torr이고 ▲저진공: 760~10³ ▲고진공: 10³~10‐⁹ ▲초고진공10‐⁹~10¹² ▲극고진공: 10¹² Torr 이하 등으로 분류합니다. 진공도 다 같은 진공이 아니라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보통 대기권 바깥 우주에 해당하는 고진공 상태부터는 기체분자가 서로 충돌하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극고진공은 정지궤도위성의 고도인 3만 6,000km 이상부터입니다. 인공으로 진공 상태를 만들 때는 보통 기체를 빼내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초고진공의 경우 단순히 기체분자를 밖으로 내보내는 방법만으로는 얻을 수 없습니다. 내부의 수분까지도 제거해야만 하는데요. 이러한 초고진공은 앞서 설명한 가속기를 비롯해 고성능 전자현미경, 우주과학, 표면과학 등의 첨단 연구에 사용합니다.

 

 

◇ 초고진공 상태 유지해야 가능한 핵융합

 

 초고진공이 사용되는 핵심적인 분야가 또 하나 있습니다. 바로 핵융합입니다.


 핵융합과 진공, 특히 초고진공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우주의 수많은 빛나는 별들에서 발생되는 핵융합 현상을 지구에서 만들기 위해서는 우주와 마찬가지인 초고진공 상태를 만들어야 합니다.

 

 인공태양이라 불리는 핵융합장치인 토카막에 진공용기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토카막 내부에서 핵융합 반응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1억도 이상의 초고온의 플라즈마 상태를 만들어야 하는데, 토카막 내부에 불순물이 있으면 열 손실이 일어나 핵융합 반응에 필요한 온도에 이르지 못하게 됩니다.

 

 

 즉, 핵융합 반응이 일어날 수 있는 초고온의 플라즈마 상태를 만들기 위해서는 토카막 내부가 초고진공 상태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초전도 토카막인 KSTAR는 초고온 플라즈마를 만들기 위해 진공용기 내부를 10‐⁹ Torr 이하의 진공 상태로 유지합니다. 이는 대기압의 10억 분의 1 수준입니다. 우주와 같다고 보면 됩니다.  

 

 

KSTAR의 최종 목표 진공도.

 

 진공 상태를 만들기 위해서는 내부의 기체를 밖으로 빼내야 한다고 했죠? KSTAR 역시 진공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운전(가동)에 앞서 기체를 배출시키는 과정을 밟습니다. 이 준비 과정이 매우 중요한데요. 진공 상태로 만들기 위해 총 12대의 펌프가 가동됩니다. 이 진공펌프를 가동해 초당 4만ℓ의 공기를 빼내게 됩니다. 가정용 진공청소기 1,300대를 동시에 가동하는 것과 같은 성능입니다. 이렇게 진공용기 내의 압력이 대기압의 10억분의 1 정도로 낮아져야 플라즈마 실험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여기에 지난 2016년에는 액체 헬륨을 이용해 극저온 상태에서 기체를 뽑아내는 ‘극저온 진공펌프’를 추가했습니다. 이 펌프를 사용하면 기존의 진공 상태보다 2배 정도 더 효과적으로 진공용기 내부의 기체를 포집할 수 있습니다.


KSTAR 진공용기 내부 모습

 


◇ KSTAR 진공용기 조립 기술·경험 ITER에서 꽃피워

 

 당연히 KSTAR를 조립할 때도 쉽지 않았습니다. 이 정도 크기의 실험용 진공용기를 만들어본 경험도 없었지만, 운전 시 어떤 일이 발생할지 예측하는 일도 쉽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운전 요구조건이 정확히 나와야 공학적인 설계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초고진공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진공용기의 요구사항을 구조적·열적으로 검증하는 데 어려움을 겪어 설계만 3년여의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2002년부터 제작에 착수해 2년 만에 부품이 만들어지면서 본격적인 진공용기 조립에 착수합니다. KSTAR 진공용기는 세 개의 섹터로 나누어 제작되었습니다. 마침내 2007년 KSTAR가 만들어지고 있는 국가핵융합연구소 현장에 입고되어 최종적으로 조립을 마쳤습니다.  

 

 우리 기술진의 이러한 성공적인 진공용기 제작과 조립 경험은 국제핵융합실험로 ITER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실제 ITER의 핵심 부품인 진공용기 본체 9개 섹터 중 2개 섹터를 한국에서 맡아 제작하고 있습니다. 또 진공용기와 저온용기를 연결하는 포트 53개도 우리 기술진이 만들어 납품하게 됩니다. ITER의 진공용기는 높이 11.3m, 지름 20m의 크기에 5,000t에 무게를 자랑합니다. 한 개 섹터의 무게만 440t에 달합니다.

 

 진공용기 섹터가 완성되면 ITER 건설 현장에서 총조립에 들어가는데요. 이때 필요한 대형 장비인 ‘ITER 섹터 부조립장비(SSAT)’ 도 한국에서 만들어져 ITER 건설 현장으로 이동했습니다. 이 장비는 무게 900t에 높이는 아파트 9층과 맞먹는 23m에 달합니다. 이렇게 큰 장비로 조립하지만, 초고진공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진공용기인 만큼 한 치의 오차도 허락하지 않는 정밀한 작업입니다.


ITER 진공용기 조립 완성도(왼쪽)과 내부 단면도. <사진 출처=ITER>

 


◇ 진공 속 질주하는 초고속 열차까지?

 

 이처럼 진공을 이용한 기술은 핵융합이나 가속기 등 거대 장치를 넘어 산업계와 일상생활에도 빠르게 확산하고 있습니다. 물체 표면에 얇게 막을 입히는 박막기술에도 진공이 이용됩니다. 반도체와 LCD 설비의 3분의 1 정도가 진공 장비입니다. 일상에서도 진공 기술이 적용된 사례를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과거 TV 브라운관이나 진공청소기를 비롯해 이제는 커피나 페니실린을 만들 때도 진공 상태에서 냉동건조를 합니다.

 

 최근에는 진공을 이용한 교통수단 개발도 활발하게 진행 중입니다. 스페이스X의 CEO인 엘론 머스크가 제안한 하이퍼루프((Hyperloop)가 대표적입니다. 이론상 최고 속도는 약 1,200km. 서울~부산을 15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로스앤젤레스 구간을 30분 안에 주파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빠른 속도가 가능한 것은 진공 상태에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튜브 내부를 진공에 가까운 상태로 유지하고, 자기력만으로 움직이는 방식입니다.


하이퍼루프 상상도. <사진 출처=하이퍼루프 원>


 실제 이러한 진공 자기부상열차를 개발하고 있는 ‘하이퍼루프 원’은 최근 진행한 테스트에서 310km의 주행 속도를 기록했습니다. 또 중국우주과학공업그룹(CASIC)도 지난 8월부터 하이퍼루프 개발에 착수했다고 합니다. CASIC은 최대 시속 4000km로 달리는 중국형 하이퍼루프 ‘T-플라이트’ 개발에 도전한다고 밝혔습니다.

 

 데모크리토스는 “우주에 존재하는 것은 원자와 빈 공간뿐, 그 외에 모든 것은 의견에 불과하다”라며 진공의 존재를 강조했습니다. 어쩌면 미래에는 누군가 “우주와 세상을 변화시킨 것은 진공뿐, 그 외에 모든 것은 의견에 불과하다“라며 진공의 위력을 강조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핵융합 발전처럼 인류의 미래를 바꿀 기술이 현실로 이루어진다면, 먼 훗날 이런 말이 회자할지도 모릅니다.  

 

“태초에 진공이 있었다. 그리고 핵융합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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