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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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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04

인류 최대 과학기술 프로젝트는 어떻게 탄생했을까?

커뮤니케이션팀   
https://fusionnow.nfri.re.kr/post/iter/1059

프랑스 남부 소도시 카다라쉬. 이곳에서는 인류 최대의 과학기술 프로젝트인 국제핵융합실험로(ITER. International Thermonuclear Experimental Reactor) 건설이 한창입니다. ITER프로젝트는 꿈의 에너지라 불리는 핵융합에너지의 상용화 연구를 위해 2만 3,000t의 거대 핵융합실험로를 건설하고 운영하는 것으로, 우리나라를 비롯해 유럽연합, 미국, 러시아, 중국, 일본, 인도 등 7개 국가가 참여하고 있습니다. 건설비용만 20조 원이 투입되는 그야말로 초대형 프로젝트입니다.


사실 서로 다른 두 국가가 함께, 무엇인가를 위해 공동 프로젝트를 하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각자 국익을 위해 원하는 방향이나 방식이 다를 수 있기 때문이죠. 7개의 회원국이, 그것도 주요 강대국들이 한자리에 모여 진행하는 ITER 프로젝트는 건설 공정률 70%에 달하는 지금까지의 과정 자체만으로도 ‘기적’으로 불릴 정도로,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왜 7개 회원국은 핵융합에너지 개발을 위해 힘을 모으기로 결정했을까요? 인류의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된 인공태양 프로젝트 ‘ITER’ 탄생에 관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프랑스 남부 카다라쉬의 ITER 건설 현장. <사진 출처=www.iter.org>

 

 

| “지금은 핵분열이지만, 미래는 핵융합”


1955년 8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제1차 원자력 평화적 사용을 위한 국제회의가 열렸습니다. 이 자리에는 인도의 가장 뛰어난 핵물리학자로 불리는 호미 바바(1909~1966)도 참석했는데요. 이 제1차 회의 의장이기도 했던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회의에서는 핵분열만 논의하지만, 미래에는 핵융합이 중심이 될 것이며, 20년 안에 핵융합에너지를 활용하는 방법이 개발될 것이다.” 비록 그가 말한 것처럼 핵융합에너지가 20년 안에 상용화되지는 않았지만, 그의 메시지는 세계 각국의 핵융합에너지 연구개발 협력을 재촉하는 자극제가 되었죠.


역사는 뜻하지 않은 곳에서 뜻하지 않은 순간에 만들어지는 법입니다. 제1차 원자력 평화회의가 열린 지 꼭 30년이 흐른 1985년 11월, 군비축소를 위한 첫 미·소 정상회담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립니다. 당시 옛 소련과 미국은 오랜 군비경쟁으로 지쳐 있었지만, 상대에게 힘의 우위를 뺏기지 않기 위해 낡은 냉전체제를 고집하고 있는 상태였죠. ‘제2의 냉전’ 시기로 불리며 오히려 대립이 심화하고 제3국에 대한 군사개입도 많아졌습니다. 40년 동안 유지된 냉전의 종결 시점 역시 불투명했습니다.


첫 정상회담에서 미국은 로널드 레이건이, 소련은 그해 공산당 서기에 오른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서로를 마주 보며 앉았습니다. 동석자는 통역 한 명이 전부였다고 해요. 이때 고르바초프가 레이건 대통령에게 뜻밖의 제안을 합니다. 미래 에너지원인 핵융합에너지 연구개발을 공동으로 진행해보자는 내용이었죠. 뜻밖의 제안을 받은 미국은 정상회담이 끝난 후 우방인 유럽공동체(EU), 일본과 이 문제를 협의한 끝에 소련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합니다. 호미 바바가 “미래에는 핵융합이 중심이 될 것”이라고 예언한 지 30년 만에 핵융합에너지 상용화를 위한 국제 공동 프로젝트의 물꼬가 트인 것입니다.

 

 

레이건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서기장. <사진 출처=wikipedia>

 

 

| 미·소 정상회담으로 국제협력 물꼬, 7개국 협정 서명

 

미·소 정상회담의 이후 미국과 소련, EU, 일본 등 4개국은 1988년 국제원자력기구(IAEA) 산하에 ITER 이사회를 구성했습니다. 당장이라도 ITER 프로젝트가 추진될 것 같은 분위기였죠. 참가국들의 열정도 뜨거웠습니다. 하지만 인공태양은 자신의 존재를 쉽게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1989년 동유럽의 동맹체제가 붕괴하고, 1991년 옛 소련이 해체되면서 국제 정세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안갯속이 되었죠.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미국과 일본은 경제 위기까지 불어 닥치게 됩니다. 당장 국가 체제가 해체되고 경제 위기가 심각해지는 상황인 만큼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가는 연구개발 프로젝트는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상황에 부닥친 것입니다.

 
하지만 세계 경제가 점차 회복되고, 기존 4개국에 이어 2003년 한국과 중국, 2005년에는 인도가 새로운 회원국으로 참여하면서 ITER 건설 프로젝트는 다시 탄력을 받기 시작합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도 장애물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ITER를 어디에 건설할 것인지를 놓고 참여국 간에 이견이 발생한 건데요. 당초 후보지 신청을 하지 않았던 일본이 경합에 나서면서 후보지 결정이 교착상태에 빠진 것이죠. 참여국의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후보지를 놓고 최종적으로 EU와 일본의 양자구도가 형성되어 치열한 경쟁을 벌였죠.

 

2006년 11월 21일 ITER 공동협정 서명식. <사진 출처=www.iter.org>

 

 
국제협력, ITER 프로젝트의 출발  바로가기
ITER는 왜 프랑스에 있을까? 바로가기

 

2005년 6월, 결국 참여국의 만장일치로 ITER 장치를 프랑스 남부의 카다라쉬에 짓기로 최종결정합니다. 6명에 불과했던 ITER 사무국에 토지, 사무실, 전기 등 각종 서비스를 제공하고 EU 회원국을 대표해 ITER 프로젝트에 다양한 지원을 약속한 프랑스가 압도적인 지지를 받은 것입니다. 이처럼 부지가 확정되면서 참여국별로 역할 분담을 마쳤고요. 마침내 이듬해인 2006년 11월 21일, 프랑스 엘리제궁에 ITER 7개 회원국 대표가 모여 ITER 공동이행협정에 서명합니다. 미국과 소련의 만남 이후 장장 21년 만에 드디어 인류의 미래 에너지를 책임질 핵융합에너지 상용화의 역사적인 첫발을 내딛게 된 것입니다.

 

 1952년 미국의 첫 수소폭탄 실험 장면. <사진 출처=wikipedia>

 

 

| 핵융합의 첫 결과물은 가공할 위력의 수소폭탄


핵융합에너지와 국제협력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인류에게 가장 처음 핵융합의 위력을 보여준 것은 무기였습니다. 바로 수소폭탄인데요. 수소폭탄은 기존의 원자폭탄을 기폭제로 써 폭탄 내에 위치한 중수소와 삼중수소가 핵융합 반응을 일으켜 폭탄의 위력을 더 키운 것입니다. 1952년 미국이 핵융합 반응을 통해 원자폭탄보다 파괴력이 훨씬 강한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합니다. 미국과 경쟁을 벌이던 옛 소련도 1년 후인 1953년 수소폭탄 개발에 성공하죠. 원자폭탄에 이은 수소폭탄 개발로 미·소를 정점으로 한 냉전체제가 본격화됩니다. 당연히 무기로서의 핵융합은 국제협력이 아니라 상대를 제압하고 상대보다 우위를 점하기 위한 배타적 개발 경쟁이었죠.

이렇게 강력한 무기로 활용되는 만큼 핵융합에너지 연구개발 초기 각국은 관련 연구를 극비에 부칩니다. 정보 교류나 국제협력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죠. 고르바초프 서기가 레이건 대통령에게 핵융합에너지 공동 연구개발을 제안했을 때 미국의 보좌관들이 반대했던 이유이기도 한데요. 이들은 “소련에 스타워즈(당시 미국의 전략방위구상)의 기밀을 주는 것과 같다”며 반대했다죠. 당시 고르바초프는 미국에 제안하기에 앞서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 대처 영국 수상을 만났다고 합니다. 수소폭탄 제조 기술을 평화적 목적의 핵융합에너지로 승화시키자는 국제협력을 먼저 논의했던 건데요. 옛 소련의 입장에서는 냉전의 장기화로 인한 체제 위기를 극복해보고자 제안한 것이지만, 결과적으로는 핵융합을 평화와 인류 번영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한 셈입니다.

 

ITER 조립 장치. <사진 출처=www.iter.org> 

 

 

| 핵융합에너지와 ITER, 냉전에서 평화로의 상징


이처럼 핵융합에너지 연구의 국제협력은 냉전과 극단적인 대결을 피하기 위한 국제정치학적 산물이었습니다. 핵전쟁의 위협에서 인류를 구하기 위한 ‘평화의 메신저’ 역할을 했던 건데요. 또 하나 핵융합에너지 연구의 국제협력이 필연인 이유는 핵융합 분야의 과학기술적 성격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 한 나라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어렵고 복잡하며, 많은 비용과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입니다.


초창기 핵융합 연구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무기 개발을 위한 기밀 사항이었습니다. 1955년 8월 제1차 원자력 평화적 사용을 위한 국제회의에서 호미 바바가 아무리 “지금은 핵분열만 논의하지만, 미래에는 핵융합이 중심이 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어도 회의에 참석한 각국의 핵융합 관련 과학자들은 침묵을 지켜야 했죠. 이처럼 각국에서 비밀리에 진행하던 초창기 핵융합 연구는 이듬해인 1956년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됩니다. 각자 해보겠다고 걸어 잠글 것이 아니라 문을 열고 함께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하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당시 소련의 최고 지도자였던 흐루시초프와 니콜라이 불가닌이 영국을 국빈 자격으로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소련의 핵물리학자인 이고르 쿠르차토프도 동행했는데요. 쿠르차토프는 영국 원자력에너지청(UKAEA)을 방문해 핵융합 반응에 대한 강의를 진행했습니다. 강의 내용은 차치하더라도 적국인 소련의 물리학자가 자신들에게 핵융합 반응과 관련된 연구 내용을 강의한다는 것 자체가 당시로써는 파격적인 일이었습니다. 비밀리에 핵융합을 연구하던 영국 물리학자들에게 놀라움과 국제협력에 대한 관심을 동시에 불러일으킨 거죠.

 

ITER 7개 참여국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다. <사진 출처=www.iter.org> 

 

 

| 국제협력을 통한 과학기술 난제 해결 시험무대


ITER는 오는 2025년 첫 플라즈마 시험 발생을 목표로, 현재 공정률 60%를 넘어 70%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1988년부터 2001년까지 장장 14년 동안 개념 설계 및 공학 설계를 마쳤고요. ITER는 현재 2단계에 접어들어 건설에 속도를 내고 있습니다. 2025년 건설이 끝나면 3단계인 장치 운영단계에 들어가 본격적인 실험에 착수하게 됩니다. 인류의 미래 에너지 확보는 물론 핵융합의 평화적 이용과 국제협력을 통한 과학기술 난제 해결이라는 ‘리트머스 시험지’ 역할도 맡고 있죠.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 세계 핵융합 선진국이 각자의 기술력을 총동원해 인공태양을 구현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수십 년에 걸쳐 진행되는 인류의 대표적인 국제 공동 프로젝트가 되었죠. 

 

ITER 토카막 장치 내부 단면도. <사진 출처=www.iter.org> 


인류의 무한 청정에너지 확보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전 세계의 기술력이 하나로 뭉친 ITER.  ITER 프로젝트의 성공은 단순한 과학기술 프로젝트의 완성이 아닌 인류의 미래를 위해 전 세계가 힘을 모은 대표적인 역사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시작과 과정이 쉽지 않았던 만큼 ITER를 통해 핵융합발전 시대로 가는 지름길을 찾아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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