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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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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02

이름을 부르자 꽃이 되었다. 플라즈마 명명 80주년

이하나   
https://fusionnow.nfri.re.kr/post/plasma/851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너무나도 유명한 김춘수 시인의 ‘꽃’이란 시입니다. 이름을 얻는다는 것은 존재하기의 시작입니다. 인간의 말과 글로 표현하지 못한다면 있어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지요. 우주의 99.99%를 채우고 있으면서도 20세기 초까지 제 이름을 갖지 못한 그 무엇도 그랬습니다. 고체도 액체도 기체도 아닌 미지의 상태가 비로소 ‘플라즈마’란 이름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따라가 봅니다.

 

기화학의 발전 속에 인류는 전에 몰랐던 새로운 물질 상태가 우주에 존재함을 알게 되었다.

 

 


전기화학 발전 속에 드러난 ‘제4의 상태’


 이 독특한 물질의 상태가 과학자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은 근대과학이 빠르게 발전하던 19세기 초의 일입니다. 당시 유럽에서는 화학적으로 전기를 만드는 데 성공한 볼타 전지의 등장에 힘입어 전기분해 실험이 열풍처럼 번지고 있었는데요.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이는 영국인 과학자 데이비(Humphrey Daby)와 그의 조수였던 패러데이(Michael Faraday)였습니다. 두 사람은 모두 약국 조수, 인쇄소 제본공에서 시작해 나란히 당대 최고의 과학자가 된 입지전적인 인물들입니다.
 
 이들은 전기분해 실험을 반복하며 새로운 원소들을 발견하였고 전자기유도와 패러데이 법칙 등 현대적인 전기화학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한편에서는 전기를 이용해 어둠침침한 가스램프보다 더 밝은 조명을 만들려는 노력도 하였는데요. 기체 속에서 생기는 방전을 이용해 아크등을 개발한 데이비, 그의 뒤를 이어 직류방전을 연구한 패러데이는 가열된 전극 주변에서 왜 강렬한 빛이 나는지 궁금했습니다. 

 

1856년 왕립학회 과학자들에게 전자기 유도를 설명하는 패러데이


 훗날 그것이 그동안 알려진 물질의 세 가지 상태와 전혀 다른 존재라는 것을 알아차린 이는 역시 영국의 화학자인 크룩스(William Crookes)입니다. 그는 진공 상태의 방전관 양 끝에 전극을 달고 전압을 걸었을 때 생겨나는 빛을 ‘제4의 물질 상태’라고 표현했습니다. 고체에 열을 가하면 녹아서 액체가 되고, 더 열을 가하면 기체로 증발하며, 더 온도가 높아지면 원자들이 전자와 양이온으로 분리된다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크룩스가 제4의 물질 상태를 발견한 1878년, 대서양 건너 뉴욕의 브루클린에서는 랭뮤어(Irving Langmuir)라는 이름의 젊은이가 과학자의 꿈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전기화학의 발전에 힘입어 급속도로 발전하는 야금학에 관심이 많았던 이 청년은 콜롬비아 대학 금속공학과에 입학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독일 괴팅겐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물리화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네른스트(Walter Herrmann Nernst) 밑에서 계면과학을 사사하지요.
 
 계면(界面)은 기체와 액체, 액체와 액체, 액체와 고체가 서로 만나는 경계면을 부르는 용어입니다. 계면과학은 이런 경계면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현상들을 연구하는 학문인데요. 공부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온 랭뮤어는 제너럴 일렉트릭(General Electric)의 연구원으로 자리를 잡습니다. GE는 토마스 에디슨이 세운 미국 최초의 기업 연구소로 당대 최고의 혁신기술들이 개발되고 있었습니다.

 

 


랭뮤어, 제4의 상태를 플라즈마로 명명하다


 1909년 GE에 합류한 랭뮤어는 1950년 부소장으로 은퇴할 때까지 이곳에서 많은 업적을 쌓았습니다. 에디슨이 발명한 백열전구의 필라멘트가 쉽게 끊어지는 원인이 유리벽에 증발기체가 흡착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질소가스로 수명을 크게 늘린 전구를 발명했습니다. 또 경쟁자로 경쟁했던 버클리대의 루이스(Gilbert Newton Lewis) 교수와 함께 원자의 공유결합 이론을 발전시킨 공로로 1932년 노벨상을 수상하게 되지요. 구름에 드라이아이스와 요오드화은을 뿌려 세계 최초의 인공강우에 성공한 것도 그의 연구팀이었습니다.

 

1927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제5회 솔베이 양자역학 회의의 랭뮤어(앞줄 맨 왼쪽). 그를 비롯해 아인슈타인, 퀴리, 슈뢰딩거, 보어, 막스 플랑크 등 당시 회의 참석자 29명 중 17명이 노벨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그의 이름이 전기화학 분야에서만 아니라 핵융합 연구사에서 더욱 특별하게 기억되는 이유는 바로 ‘플라즈마’의 최초 명명자이기 때문입니다. 1928년 이미 GE의 핵심 과학자로 명성을 떨치던 랭뮤어는 글로우 방전을 연구하던 중 기체가 가열되면 특이한 성질을 갖게 된다는 크룩스의 설명을 확인했습니다. 글로우 방전은 매우 낮은 압력에서 기체를 채운 방전관에 전극을 놓고 높은 전압을 가하면 전류의 흐름에 따라 희미한 빛이 발생하는 현상입니다.
 
 랭뮤어는 방전으로 빛나는 부분의 모양이 방전관의 형태의 따라 변하는 것을 관찰한 뒤 이를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전자가 거의 없는 전극 근처에서 이온화된 가스는 거의 같은 수의 이온과 전자를 포함하므로 공간합성전하(resultant space charge)가 매우 작다. 이렇게 이온과 전자의 전하량이 균형을 이루는 영역을 설명하기 위해 플라즈마(plasma)라는 이름을 사용할 것이다.”
 
 그리스어에도 해박했던 것으로 알려진 랭뮤어는 이런 현상이 생물학과 의학에서 혈장(血漿)을 의미하던 플라즈마(plasma)와도 닮았다고 생각했는데요. 플라즈마는 그리스어로 ‘틀에 부어 만들어지는 상태’를 뜻합니다. 특별히 그가 혈액의 혈장을 떠올린 것은 이온과 전자의 움직임이 적혈구와 백혈구가 혈장을 따라 움직이는 것과 거의 같은 방식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는 또 플라즈마가 “기체와 전혀 다른 성질을 지니고 있으며 매우 높은 온도에서 이온, 전자, 양성자와 같이 전하를 띤 입자들이 자유롭게 섞여 있는 전기적 중성의 상태”라고 정의하였지요.

 

 


‘플라즈마’라는 이름을 갖고... 인류의 꽃이 되다


 온전한 이름을 얻은 ‘플라즈마’는 연구에도 빠르게 속도가 붙습니다. 태양계 총 질량의 99% 이상을 차지하는 태양이 플라즈마로 구성되어 있음이 밝혀졌고, 전 우주로 범위를 넓히면 우리가 그동안 알았던 고체, 액체, 기체의 물질은 모두 합쳐도 채 0.01%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주나 자연에서만 관찰되던 플라즈마를 실생활에 응용하는 기술도 빠르게 발전하고 있습니다. 특히 반도체 분야에서는 플라즈마의 높은 반응성, 선택적 조절 능력, 그리고 매우 높은 활성화 능력을 이용하여 미세 패턴을 만드는 데 활용되고 있습니다. 플라즈마 내부는 고 에너지의 전자와 입자들로 이루어져 있고 전하를 띈 입자는 전자기장으로 쉽게 제어할 수 있기 때문에 이전에 불가능했던 여러 공정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또한, 플라즈마의 활용 범위는 환경, 에너지, 생명공학, 재료와 의학까지 다양하게 확대되며 첨단 산업기술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선도 기술 중 하나로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1934년 강연을 위해 막스플랑크 연구소를 찾은 랭뮤어. <이미지 출처=GE 홈페이지>

 

 

 한편 플라즈마의 명명자인 랭뮤어는 그의 이름 역시 저명 과학저널 <랭뮤어>와 미국 화학회가 수여하는 <랭뮤어 상>으로 남아 있습니다. 또 그의 이름을 딴 ‘랭뮤어 탐침’은 플라즈마 밀도와 전자 온도를 측정하는 가장 대표적인 진단장치로 활약하고 있지요. 지난 2013년 발사된 나로호에는 KAIST가 개발한 나로과학위성이 탑재되었는데요. 여기에는 시시각각 변하는 태양의 움직임을 관찰하기 위해 한국이 독자기술로 개발한 랭뮤어 탐침이 포함되었습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플라즈마의 활약이 가장 돋보이는 분야는 ‘핵융합에너지’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란 아름다운 시구처럼 우주 탄생 이후 137억 년 만에 마침내 제 이름을 얻은 플라즈마가 인류에게 선사하고 있는 가장 크고 화려한 꽃이지요. 화석연료 고갈과 환경 위협에 시달리던 인류는 이제 1억도 이상의 초고온 플라즈마 속에서 태양과 같은 무한 청정의 핵융합에너지를 만드는 세상을 꿈꾸고 있습니다. 플라즈마와 핵융합이 열어가는 이 전대미문의 새로운 세상, 그런 미래를 위해 헌신하고 있는 핵융합 과학자들을 우리의 후손들은 또 어떤 이름으로 불러줄지, 벌써부터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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